영화관에 들어섰다. 30명 남짓 되는 관객들 대부분이 어르신들이다. 특히 남자 어르신들이 간간히 보인다. 한 젊은 청년과 나를 빼면 관객의 평균 연령은 분명 50 이상이다. 반 세기 이상의 격동의 한국사를 살아오신 분들이 북유럽의 이 낮선 영화를 기꺼이 선택한 이유는 뭘까? 예술영화관도 아니고 선택의 폭이 많은 시내 한복판의 멀티플렉스관에서. 새로운 삶의 형태에 대한 관심일까? 남편 바람 한 번쯤은 겪어본 아내들일까? 바람 한 번쯤은 펴 본 남편들일까? 토마스 빈터베르크의 새 영화에 관심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상한 제목이 맘에 들어서?
토마스 빈터베르크 영화. 20 여년만에 보는 것 같다. 당시 라스 폰 트리에와 함께 덴마크 스타일의 새로운 영화 바람을 몰고 왔던 토마스 빈터베르크. 핸드 헬드 카메라 때문에 정신 없이 화면이 흔들렸던 영화 셀레브레이션이 떠오른다. 매즈 미켈슨이 주연한 더 헌트는 아직 못봤다. 라스 폰 트리에와 달리 소식이 뜸했던 토마스 빈터베르크. 그의 영화를 극장에서 다시 만나서 반가웠다. 그 당시 같이 셀레브레이션을 봤던 친구는 지금 무얼하고 있을까?
가족의 형태가 급변하는 시대. 새로운 가족의 개념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 나라에도 공동체적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서 영화 속 모습이 낮설지는 않았다. 같이 홀라당 벗고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은 좀 그렇지만 문화적 차이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씨앗을 보면 돌부처도 돌아안는다는 말이 있다. 남편의 여자와 같이 산다는 안나의 선택. 굳이 실험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것 같다. 철저히 자기 파괴적이다. 북유럽의 쿨함도 거기까지인 것이다.
영화의 끝은 공동체의 구성원인 아이는 아파서 죽고 안나는 결국 공동체를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슬프지는 않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삶과 감정에 대한 거짓은 없다. 아닌 것처럼 가장하거나 타인을 속이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자신의 감정을 기꺼이 표현하고 그리고 극복해나간다. 그래서 개운하다. 가족이나 사회 어디에서도 감정을 드러낼 수 없는 우리 사회를 생각하면 씁슬한 기분이 든다. 앞으로 우리 나라도 개운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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